박 충 서

<목차>
가족 현악 사중주단을
꿈꾸던 학생 시절
우연히 복음을 깨달은 아내와
결혼한 후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
 
 
국외의 다른 인물들
- 윌리암 틴데일 (1490 ~ 1536)
- 존 칼빈 (1509 ~ 1564)
- 존 녹스 (1514 ~ 1572)
- 블레즈 파스칼 (1623 ~ 1662)
- 존 번연 (1628 ~ 1688)
국내의 다른 인물들
- 문명래
- 박충서
- 연광숙
 
예수께서 내게 주신 양심의 평화

박충서
1942년 충북 청주 출생
2007년 11월 소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후 치과의로 일해 왔다.
1974년 복음을 깨닫고 2001년부터 2007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독교복음침례회 총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맡은 바 일에 순종으로 임했다.
 

가족 현악 사중주단을 꿈꾸던 학생 시절


나는 유교 사상이 가득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는데, 청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청주에서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에는 책가방이 없어서 누구나 넓은 보자기로 책을 싸서 메고 다녔는데, 그 책 보자기를 학교에서나 가끔 펼쳐 보았을 뿐 집에서는 펴 보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방에 던져 놓고는 밖에 나가 놀기에 바빴다.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고 반 아이들이 70명이면 70등, 80명이면 80등이 내 차지였다. 대전으로 전학을 온 후, 선생님께서 내 성적표를 보시고 야릇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청주에서는 숙제 없이 지냈는데 대전에서는 숙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청주에서는 방학 숙제도 없었다. 내게는 이 숙제가 생소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책을 보았고 선생님의 말씀도 듣게 되었다. 수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을 볼 때마다 15등 내지 20등씩 성적이 올랐고, 5학년이 되었을 때는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성적순으로 반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반장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중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고도 1개월 정도 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에서 담임선생님은 내 이야기만 하셨다. 지금도 나는 이 선생님의 존함만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과 국어였고, 좋아하는 과목은 음악과 수학이었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오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런 날은 체육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신이 났다.(칠순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이에 내가 교회를 알고 이제 와서 유도와 태권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봐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학교 방송실에서 음악을 들려 주었는데 난생 처음 듣는 그 음악이 어찌나 경쾌하고 힘 있고 아름답던지, 운동장에서 놀던 것도 잊고 그대로 서서 듣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 나니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아! 음악이 이런 것이구나.’ 초등학교 4학년, 10살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 뒤, 오디오는 커녕 FM 방송도 없던 때라 어쩌다 AFKN 방송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오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밥 먹으라는 야단도 많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는데, 학교 수업과 레슨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 악기 연습을 병행하자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경보음이 울리면 일어나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루는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큰 형님이 이 집이 너 혼자 사는 집이냐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나는 창과 벽을 담요로 두르고, 피아노에 담요를 씌어 놓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그 안에서 연주를 했다. 선풍기도 없었기에 그렇게 피아노를 치다 보면 땀으로 목욕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학교에 가서 연습했다. 예과가 청량리역 맞은편에 있었는데,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이 있었다. 강의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강의실에서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었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것으로 보아 다른 학생들은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점심을 굶고 그 시간에 연습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가정을 이루면 넓은 잔디밭이 있는 정원에서 가족으로 구성된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나이에 으레 생각하는, 사람이 왜 태어났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싸움 한 번 한 적 없고, 학교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고, 착하다는 말이 항상 따라 붙는 소위 모범생이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 그것이 나에 대한 수식어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기인 한 친구에게는 ‘너는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범생이라는 말이 과연 좋은 말인지 의문이 간다.

그러나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았다 하더라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씻을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죄를 지은 적이 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던 그때 지은 죄. 그 죄로 인한 자책감. 가슴은 있는 대로 두근거렸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은 죄가 아니어서인지, 차츰 생각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면서 여전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살아왔다. 심지어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Copyright (c) THE EVANGELICAL BAPTIST CHURCH. All Right Reserved.
주소 : 140-011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231-23 기독교복음침례회 / 대표전화 : (02)796-0092 / 팩스 : (02)796-8770